이것이 인간인가 - 프리모 레비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그리하여 겨우내 우리의 유일한 적이었던 추위가 가시자 우리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며 오늘 "배만 고프지 않다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p.110~110


유대인 특권층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하다. 현재, 과거, 고래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엔서 하나가 되며,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물론 몇몇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 사람은 일반 규정을 면제받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 밉살스럽다.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에게는 더 큰 힘이 주어질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의 소대를 지휘하는 책임이 그에게 맡겨져 그가 그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권리를 갖게 되면 그는 잔인하고 포악해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 자리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압제하는 사람들에 대한 욕구불만의 찌꺼기를 자신이 압제하는 사람들에게 비이성적으로 퍼붓는다. 위에서 받은 모욕을 밑에 있는 사람에게 증오의 형태로 폭발시키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p. 137~138


나와 로렌초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길면서도 짧고, 평범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이야기다. 그것은 이미 현재의 모든 현실에 의해 지워져버린 시간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로렌초의 이야기가 전설 속이나 먼 태곳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들처럼 그렇게 이해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간단한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민간인 노동자가 여섯달 동안 매일 내게 빵 한 쪽과 자기가 먹고 남은 배급을 갖다주었다. 누덕누덕 기운 자기 스웨터를 선물로 주었다. 나를 위해 이탈리아로 엽서를 보내주었고 내게 답장을 전해주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그는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았다. 착하고 단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기가 보답을 받을 만한 선행을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략) 사실 민간인에게 우리는 불가촉천민이다. 민간인들은 대체로 노골적으로, 경멸과 동정이 뒤섞인 뉘앙스로, 이와 같은 삶을 선고받고, 이런 상황으로 떨어진 걸 보면, 우리가 알 수 없는 매우 심각한 죄를 지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그저 동물의 소리처럼 그로테스크하게 들리는 우리의 다양한 언어를 듣는다. 머리카락도 없이, 이름도 없이, 체면도 없이 노예처럼 비천하게 일하고, 매일 얻어맞고, 매일 굴욕을 당하는 우리를 본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눈에 담긴 반항이나 평온 혹은 믿음의 빛을 읽어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를 진흙투성이의 누더기를 입은 굶주린 도둑으로, 사기꾼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 우리가 이런 굴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한다. 그들 중 우리의 얼굴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에게 우리는 '카체트', 중성 단수 명사일 뿐이다.
(중략) 나와 로렌초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수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 내가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중략)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p. 185~187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 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물론 공포정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거기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독일 국민은 전체적으로 저항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는 특별한 불문율이 널리 퍼져 있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으며,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획득하고 방어했다. 그런 무지가 나치즘에 동조하는 자신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어주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입과 눈과 귀를 다문 채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환상을 만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자신은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공범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는 것, 그리고 알리는 것은 나치즘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법(결국 그리 오래지 않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나는 독일 국민이 전체적으로 이런 방법에 의지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바로 이런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

p. 276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정상적인 인간 중에서 히틀러, 힘러, 괴벨스, 아이히만 등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지만 안도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이는 안타깝게도 행동으로 옮겨졌다)이 이해 불가능하다는 것은 다행인 일이기도 하니까. 사실, 그것들은 인간적인 말과 행동이 아니다. 역사에서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고, 생존을 위한 가장 잔인한 생물학적 투쟁과도 비교가 어려운 것이다. 전쟁을 이런 투쟁과 연결짓는 것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는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전쟁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전쟁의 극단적인 형태가 아니다.
(중략)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공개적으로 연설을 할 때 사람들이 그들을 믿었고 박수갈채를 보냈고 감탄했으며 신처럼 경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자신들이 한 말의 신뢰성이나 정의로움을 앞세우지 않고 장황한 말로, 연극배우 같은 방법으로 본능적으로 혹은 끈기 있는 훈련과 습득을 통해 암시적으로 말을 했으며 사람을 홀리는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들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대개 비정상적이거나 어리석거나 잔인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을 받았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수백만의 추종자들이 그들을 따랐다. 비인간적인 명령을 부지런히 수행한 사람들을 포함한 이런 추종자들은(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타고난 고문 기술자들이나 괴물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괴물들은 존재하지만 그 수는 너무 적어서 우리에게 별 위협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람들, 아무 의문 없이 믿고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기술자들이 훨씬 더 위험하다. 아이히만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던 회스, 트레블링카 수용소 소장이었떤 슈탕글, 20년 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30년 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병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p. 301~303


덧글

댓글 입력 영역